닫기

“60년 넘도록 우릴 잊지 않았다니 믿기지 않는다”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review.asiatoday.co.kr/kn/view.php?key=20140914010006546

글자크기

닫기

김종원 기자

승인 : 2014. 09. 15. 05:00

[인천상륙작전 64주년] 미군 참전 노병들 "기억만 해줘도 눈시울이 뜨거워 진다"...에드로이스 위원장, 심호명 회장, 김종헌 장군, 하스킨스 40사단장 '한미혈맹' 다져
에드로이스 위원장과 영김, 심호명, 40사단장
에드 로이스 미 하원 외교위원장(왼쪽 셋째)과 로렌스 하스킨스 미 40사단 새 사단장(첫째), 심호명 담제보훈기념사업회장(둘째), 주 하원 의원에 출마한 영 김씨가 지난달 11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 알라미토스 시에서 열린 미 40사단 사령부 신청사 개청식과 사단장 이취임식에서 한국전쟁 참전 ‘전우상’을 배경으로 심 회장이 한미동맹 기념패를 증정하고 있다. / 사진=담제보훈기념사업회 제공
“한 나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하느님도 외면한 것 같은 깊은 산중에서 혹독한 추운 겨울을 보낸 우리들이다. 하지만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우리를 위로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우리를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 우리 노병들의 눈시울은 뜨거워진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경기도 가평에서 천막을 짓고 공부를 하는 한국인들을 위해 현재 ‘가평고’를 짓고 한미 군사동맹의 선봉역할을 한 미40사단 한국전쟁 참전용사회 브렌트 제트 회장은 지난달 11일 사단 신청사 개청식에서 한미혈맹을 이렇게 평가했다.

15일 인천상륙작전 64주년을 맞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을 진두지휘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동상 하나를 세우는데도 사회적 논란에 처해 있다.

해마다 사비를 들여 6·24전쟁 참전국을 찾아 참전용사들에게 보은행사를 베풀어 주고 있는 심호명 담제보훈기념사업회장(밝은사회 국제클럽 한국본부 총재·제주물산 대표)은 인천상륙작전 64주년을 하루 앞둔 14일 지난달 11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 알라미토스 시에서 열린 미 40사단 사령부 신청사 개청식과 사단장 이취임식에서 만난 참전용사들의 소식을 전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담제보훈기념사업회를 만들어 대한민국 국민과 국가를 대신해 해외 참전용사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있는 심 회장은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 특공대장이었던 김종헌 예비역 육군 준장(육사24기)과 함께 한미 군사동맹의 ‘선봉’ 역할을 했던 미40사단 신청사 개청식에 초청 인사로 다녀왔다. 김 장군은 1976년 8월 18일 도끼만행 사건 때 순직한 미군 경비중대장이었던 아서 보니파스 대위 친구를 만나 당시를 회고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미 40사단 사령부 신청사 개청식에서는 한국참전을 기념하는 세계적 조각가 프랭크 바르가의 ‘전우상’ 동상 제막식과 함께 전사한 미 참전용사들의 인식표(군번줄)를 녹여 만든 ‘펀치볼’ 조형물, 심 회장이 그동안 증정한 기념 메달과 감사패, 액자 등이 청사 현관 로비에 전시됐다.

한국전쟁 태극기 간직 참전용사
‘평화의 사도’ 메달을 목에 건 알프레드 커티스 한국전 미군 참전용사(왼쪽)가 전쟁 당시 소지하고 있던 태극기와 함께 참전 당시 흑백 사진, 참전부대 마크가 인쇄된 수건을 60년 동안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면서 펼쳐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친한파’ 의원으로 알려진 미 공화당 소속의 에드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과 한국 주미 대사관 관계자들도 참석해 확고한 한미동맹을 다졌다.

특히 담제보훈기념사업회는 지난달 7~12일 보은행사 미 방문 기간에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 출라 비스타 시에 있는 주립 ‘참전용사의 집’을 찾아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 해병대로 참전했던 용사들을 비롯해 18명에게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장과 재향군인회장 명의의 ‘평화의 사도’ 증서를 일일이 전달하고 메달을 목에 걸어 줬다.

심 회장은 “16~17살 꽃다운 젊은 나이에 한국전쟁에 참전해 부상을 당해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오직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참전용사들을 보면 더 이상 늦기 전에 이 나라와 국민들에게 감사를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더욱 든다”면서 “맥아더 장군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확고히 할 수 있었는지 자라나는 우리 젊은 세대와 국민들이 다시 한번 한미동맹의 고귀한 희생과 가치를 높이 사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번 담제보훈기념사업회의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위한 ‘참전용사의 집’ 위문 행사는 미국의 NBC·ABC 유력 방송사까지 관심을 보이면서 주요 뉴스로 전국에 일제히 보도됐다.

평화의 사도 메달을 목에 건 알프레드 커티스 참전용사는 “이 메달을 받으러 한국으로 오라는 초청을 받았지만 아쉽게도 갈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커티스 씨는 한국전쟁 당시 갖고 있었던 태극기와 참전부대 마크가 인쇄된 수건을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한 지 20일 만에 한국전선에 배치됐던 유진 마틴슨 육군 병장은 “나는 17살에 미 육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마자 그렇게 빨리 또 전쟁이 일어날 줄은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다”면서 “한국전쟁에 배치됐을 때는 불과 19살 이었다”고 회고했다.

1달러 기적 40사단 한국동상
지난달 11일 개청식을 가진 미 40사단 사령부 새 청사 로비에는 한국참전을 기념하는 세계적 조각가 프랭크 바르가의 ‘전우상’ 동상과 함께 전사한 미 참전용사들의 인식표(군번줄)를 녹여 만든 ‘펀치볼’ 조형물, 심호명 담제보훈기념사업회장이 그동안 증정한 기념 메달과 감사패, 액자 등이 전시됐다.
심 회장은 “한국전쟁 16개 전투참전국의 참전용사들 중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이들을 찾아가 진정어린 감사를 전할 계획”이라면서 “이제는 참전용사뿐만 아니라 그 당시 한국에 자국의 젊은이들을 흔쾌히 보내줬던 정치인과 그 나라 국민들에게도 감사를 표해야 한다”고 말했다.

심 회장은 “힘없는 국가의 자유와 정의는 허공의 메아리일뿐”이라면서 “이 땅에 자유와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우리는 너무나 절실히 경험했다”면서 “해외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버질 화이트헤드 미 해병대 연합회 출라 비스타 시 미첼 페이지 지부장도 심 회장 일행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미 해병대는 이번 행사를 위해 특별히 의장단을 보내 의미를 더 했다.

‘참전용사의 집’에서 만난 노병들은 한국전쟁 당시 부상을 당해 한쪽 팔과 발이 없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이 눈만 감고 있는 참전용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재 의식은 있지만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며 눈을 뜨거나 거동도 할 수 없어 전속 간호사 도움을 받는 상태의 참전용사들도 참석해 계속 눈을 감고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여군 출신으로 이뤄진 전속 간호사들은 “한국인 친구들을 위해 오랜만에 병실 밖으로 나왔다”고 말해 한국방문단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참전용사 1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 출라 비스타 시에 있는 주립 ‘참전용사의 집’에는 한국전쟁 당시 참전했던 미군 참전용사 대부분이 이제는 80~90살을 훨씬 넘은 고령에 단지 의식만 있지 의사소통이나 눈을 뜨거나 거동도 할 수 없이 산소통에 의지한 채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노병들이 많아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에서 실시된 인천상륙작전은 제1단계 작전이 오전 6시30시 미 해병 1개 대대로부터 시작됐다. 2단계 작전은 당일 오후 5시30분 미 해병 2개 연대와 한국군 해병대 1개 연대가 참전했다.

상륙군은 미 육군 1개 사단과 미 해병 1개 사단, 한국 육군·해병대 각 1개 연대로 모두 7만5000여명이 참가했다. 함정은 미국225, 한국15, 영국12, 캐나다3, 호주2, 뉴질랜드2, 프랑스1, 네덜란드1 등 261척이 동원됐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 작전 과정에서 북한군 1만4000명을 사살하고 7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하지만 유엔군도 578명이 전사하고 2601명이 부상 당했으며 69명이 실종됐다.

해군은 지난 13일부터 15일까지 대대적으로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 행사를 열고 있다. 해군 관계자는 인천상륙작전 의의에 대해 “서울 수복의 교두보 확보와 함께 인민군의 후방 병참선을 차단했다”면서 “인천~낙동강 전선의 인민군 약 2만 명이 고립되고 섬멸돼 전세를 공세로 전환시킨 정말로 기적같은 작전이었다”고 말했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이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던 영감은 바로 1759년 프랑스군과 영국군 간에 치러진 퀘벡전투(아브라함 평야전투)의 교훈이었다. 맥아더 사령관은 전쟁 발발 4일 째인 1950년 6월 29일 한강전선을 시찰한 후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고 곧바로 미 극동군사령부 참모장 알몬드 소장에게 상륙작전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인천상륙작전을 한창 준비하고 있었지만 미 합참은 인천은 상륙작전으로 적합하지 않다면서 군산·주문진 등 다른 지역을 추천했다. 맥아더 사령관이 계속 인천을 고집하자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은 미 극동군사령부에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셔먼 해군참모총장을 급파했다.

판문점 도끼 특공대장과 보니파스 친구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 특공대장이었던 담제보훈기념사업회의 김종헌 예비역 육군 준장(육사24기·왼쪽)이 1976년 8월 18일 도끼만행 사건 때 순직한 미군 경비중대장이었던 아서 보니파스 대위 친구를 만나 당시를 회고하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미 육·해군의 두 수장과 함께 맥아더 사령관을 비롯해 미 극동군해군사령관 조이 중장, 제7함대사령간 스트러블 중장, 제1상륙전대사령관 도일 소장 등 미 해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참석하는 상륙장소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맥아더 사령관은 회의 참석자들의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문제점과 어려움에 대해 들었다.

이에 대해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의 실현 불가능성을 제시한 여러분들의 의견은 나의 작전계획을 더욱 확고히 해 주었다”면서 “왜냐하면 적의 지휘관도 그런 무모한 시도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맥아더 장군은 “적의 허를 찌르는 것이야말로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라면서 191년 전에 있었던 캐나다 퀘벡전투 교훈을 상기시켰다.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은 인천상륙이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을 것”이라면서 “나는 그들의 허를 찌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오히려 맥아더 사령관의 설명에 설득 당하고 말았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PC-703함장으로 참전했던 이성호 전 해군참모총장(당시 중령)은 “9월 15일 인천 앞바다에 200~300여 척의 함정이 나타났다”면서 “새벽 6시 상륙작전 이전부터 구축함 전대가 포격을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이 전 총장은 “인천 시내가 뽀얗게 포연으로 덮였다”면서 “인천상륙작전은 나의 군 생활 중 가장 큰 소득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전 총장은 “군 지휘관은 절대로 약이 오르면 안되며 항상 웃어야 된다”면서 “특히 함장이 모든 것을 오픈해 부하들에게 숨기지 말고 솔선수범하면 그 함정은 잘 되게 돼 있다”고 강조했다.

인천 참전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미국 캘리포니아 주 ‘참전용사의 집’의 한 미 해병대 참전용사가 지난달 11일 국가보훈처와 재향군인회가 증정하는 ‘평화의 사도’ 증서와 메달을 받으면서 생각에 잠겨 있다.
김종원 기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