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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성 칼럼] 국제 정치에서 미치광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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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3. 10. 15. 18:06

이효성
아시아투데이 논설고문
국제 정치에는 미치광이론(madman theory)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위협적인 국제 협상에서 비합리적으로 지각되는 것이 그 당사자에게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바꾸어 말하면, 적이나 상대에게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자신을 도발하면 자신이 돌아버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예측불가의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이 유리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학문적 이론은 아니고 그럴 개연성에 근거한 일종의 주장이다.

미치광이론의 원조는 니콜로 마키아벨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로마사 논고(Discourses on Livy)》에서 "때로 미치광이인 체하는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 미치광이론을 현대에 국제 관계에서 실제로 사용해 오고 있는 국가는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주변의 아랍국들이 도발하면 우리는 돌아버려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전략을 구사해 왔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최근 하마스의 대대적 공격에 대한 거센 보복에서 보듯, 이 전략에 따라 아랍권의 공격을 받으면 반드시 당한 이상으로 보복한다.

현실 정치에서 '미치광이론'이라는 말을 쓰고 이를 실제로 이용한 정치가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었다. 닉슨과 그 행정부는 공산권으로 하여금 그가 비합리적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지도자로 생각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는 백악관 비서실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것을 미치광이론이라고 부른다. 나는 북(北)베트남인들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내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믿기를 바란다." 실제로 1969년 10월 닉슨 행정부는 미군 병사들에게 전(全)지구적 전면전의 대비 태세를 명령했을 때 소련에게 "미치광이(닉슨)가 날뛰고 있다"는 식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닉슨 대통령의 '미치광이론'은 그가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부통령으로서 휴전을 반대하고 북한과 전쟁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을 서울에 와 설득하는 과정에서 착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승만은 닉슨에게 자기의 그런 주장은 북한의 허를 찌르기 위한 의도적인 허풍임을 고백하며 "내가 어떤 행위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상시적인 견제가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닉슨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통찰"을 높이 평가하여 미치광이론을 발전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도 미치광이론을 구사한 것으로 말해진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 적대국이나 동맹국과의 거래에서 매우 황당한 요구를 했는데 그의 그런 행동은 미치광이론의 예로 풀이된다. 특히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재협상에서 미국 측 협상가들에게 "한국이 이번에 양보하지 않으면, 이 미친 자(this crazy guy)가 협상을 끝장내 버릴 것이다"라고 경고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또 미군의 주둔비 협상에서 한꺼번에 600%의 증액을 요구하며 그에 따르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이르는 과정 및 전쟁 수행 과정에서 간간히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내비친 것도 미치광이론의 한 예로 제시되기도 한다. 북한의 김정은이 한국과 미국을 향해 핵무기로 공격할 수 있다고 위협하는 것도 미치광이론의 예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다시 당선되면 미군 주둔비 협상에서 미치광이론을 다시 써먹으려 할지 모른다. 이래저래 한반도는 미치광이론의 현대적 발생지이고 시험장이기도 하다.

트럼프가 재선되어 터무니없는 주둔비 인상을 요구한다 해도 그것은 확실한 미치광이 전략이기에 별로 염려할 것은 없다. 그러나 김정은의 언행은 미치광이론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그것이 단순히 한국이나 미국을 흔들기 위해 미치광이론을 활용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진짜 미친 것이라면, 또는 미친 척하기 위해 도발의 강도를 점점 높여간다면, 정말 큰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에 우리는 그에 철저히 연구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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