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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침묵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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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3. 11. 07. 14:45

이황석 문화평론가
아버지는 젖소 열댓 마리를 키우는 작은 농장을 운영하셨다. 덕분에 나의 유년 시절은 풍요로우면서도 결핍투성이였다. 동물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다양한 가금과 짐승을 기르셨다. 사람을 잘 따르지 않는 거위도 아버지에겐 주둥이를 주억거리며 머리를 쓰다듬어달라고 달라붙기 일쑤였다. 개들은 다섯 손가락 수를 넘나들었고, 고양이는 손발 가락 수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키운다기보다는 자유로운 방목에 가까웠다. 행복한 동물들이 많았던 환경은 유년의 추억이라는 풍요를 남겨주었고, 한편으론 농장이 마을과 떨어져 있던 이유로 외로움도 컸다.

그런 유년 시절, 옥수수 추수를 마친 빈 밭, 늦가을에 파종한 호밀이 한겨울 내린 눈을 이불 삼아 푸릇푸릇 싹을 틔우던 때였다. 어느 날 갑자기, 먼발치로 호밀밭 끄트머리에 움막이 보였다. 호기심에, 쌓인 눈과 어린 호밀로 폭신폭신해진 밭을 가로질러 가보았다. 지척에서 보니 움막이랄 것도 없는 짐승의 우리처럼 보였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누가 짐승을 키우려고 지어 놓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돌아서는 순간, 버스럭대는 소리에 다시 뒤돌아 가까이 가보았다. 그런데 우리 안엔 송아지만 한 개들이 서로 뒤엉켜 버글대고 있었다. 소스라쳐 놀라 도망쳐 집으로 한걸음에 내달렸다. 그 기억은 여태껏 내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개들은 짖지 않았다. 서로를 짓밟고 움막의 널빤지를 긁어대고 있었지만 아무도 으르렁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어른들께 이르듯이 눈으로 본 사실을 토해내는데, 대수롭지 않게 노마네 아저씨(땅 주인)가 아랫마을 도사견을 키우던 개장수에게 땅을 빌려주었다고 하셨다. 어린 나는 그 많은 개가 짖지 않는, 현실과 괴리된 장면을 어떻게 설명할지 몰라 말을 더듬었다. 두서없는 말을 한참 듣고 계시다가, 놀란 아이의 반응이 이해되셨는지 어머니께서는 머리를 꼭 안아주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개들 목에 수술했다고 한다. 성대 수술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않게 하면서 동시에 비육에 도움이 된다는 말은 한참 뒤에서야 들었다. 지금도 개들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던, 아니 낼 수 없었던 그 장면은 그 어떤 살풍경보다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옥이 있다면, 그 중심 자리는 그와 같은 풍경이 아닐지 싶다.

침묵에 관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양들의 침묵'이다. 토머스 해리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각색한 조나단 뎀 감독이 연출한 영화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명작이다. 영화 교과서로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주인공 조디 포스터의 클로즈업된 정면 쇼트와 그녀의 입가에 나방이 그려져 있는 영화 포스터는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한 번쯤 보았을 만큼 유명하다. 사실 포스터 이미지엔 이미 영화에 관한 많은 코드가 담겨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신출내기 FBI 교육생 스털링(조디 포스터 분)이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을 잡기 위해, 희대의 살인마로 특별한 구금시설에 격리된 정신과 의사 렉터 박사(안소니 홉킨스)를 만나 도움을 청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우여곡절 끝에 한니발 렉터는 스털링에게 마음을 열고 그녀를 도와준다. 어린 시절 경찰인 아버지가 사고로 죽고, 어떤 농장에 입양된 스털링은 어느 날 양들이 도살당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아 어린 양을 훔쳐 도망치다 잡혔던 기억이 있다. 성인이 된 이후로도 그녀에겐 양을 구하지 못한 사실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정서적 장애를 극복하고 스털링은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하고 나아가 정식 FBI 요원으로 거듭나게 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녀의 성장기 혹은 극복기가 아니다. 영화의 결말은 희생 제의가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며 우울하게 막을 내린다.

연장선에서 영화 포스터에 클로즈업된 조디 포스터의 입을 막고 있는 나방의 등엔 해골 문양이 그려져 있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관능적 죽음'이라는 사진 이미지가 차용됐다. '양들의 침묵'의 양들은 희생양을 상징한다. 죽음으로 희생된 이들은 침묵한다. 따라서 살아남은 이들은 그들의 목소리가 침묵으로 남지 않기 위해 그 이름을 애타게 부른다. 살아생전 아름다웠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본다. 희생이 그저 죽음으로 끝나지 않게 마음을 모은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회는 멜랑콜리에 빠지고 죽음충동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지난 일주일 전, 우리는 이태원 참사 일주기를 맞이했다. 그런데 국가적 애도를 취해야 할 일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매체가 적지 않았다. 그 어떠한 방식으로든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사회는 이미 지옥이다. 우리를 지옥에서 구원하는 길은 오직 하나 침묵하지 않는 일이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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