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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아랍세계의 형태(Gestalt)는 어떻게 진화하였는가?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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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4. 01. 10. 18:22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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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이슬람 내 두 주요 종파인 수니파와 시아파의 형성

서기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가 죽었을 때 아랍 부족 원로위원회는 새 모슬렘 공동체에서 합의와 조화를 가장 잘 유지할 수 있는 인물로 무함마드의 장인인 아부 바크르(Abu Bakr)를 그의 후계자, 즉 캘리프(caliph)로 선출했다. 소수가 그 문제는 인간의 오류성을 의미하는 투표에 부쳐서는 안 된다며 권력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장 가까운 혈족인 그의 사촌인 알리(Ali)에게 자동적으로 전수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충돌은 결국 이슬람의 두 주요 종파를 형성했다.

아부 바크르의 추종자들은 "전통과 합의의 사람들"이라는 말을 줄인 수니(Sunnis)파가 되었다. 반면에 시아-알리(Shia-Ali)의 추종자들은 새 이슬람 사회의 통치는 비밀스럽게 전하는 요소를 갖춘 정신적 과업이라고 믿는 시아파가 되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모슬렘은 무함마드로부터 직접 내려오는 정신적으로 재능 있는 개인들에 의해서 그들이 지도될 경우에만 무함마드의 계시와 올바른 관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침내 제4대 캘리프로 알리가 권좌에 오르자 그는 반란에 의해 도전을 받았고 한 폭도에 의해서 살해되었을 때 수니파들은 중심적 과제를 이슬람의 질서회복으로 취급했고 안정을 재수립한 파당을 지지했다. 그러자 시아파들은 새로운 권력자들을 부당한 찬탈자로 규탄하고 그리고 저항하다가 죽은 순교자들을 떠받들었다. 이러한 태도들이 수세기간 계속되었다. 이란은 중동에서 시아파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가장 큰 국가가 되었다.
◇아야툴라 호메이니의 등장

20세기 이란의 왕, 사 레자 팔라비(Shah Reza Pahlavi)는 1970년대 미국에 의해 중동의 안전을 유지하는 중동의 헤게모니 국가로 인정되었다. 그에게 대항하는 이란의 혁명은 민주주의와 경제적 재분배를 요구하는 반-군주주의 운동으로 시작했다. 적어도 서방세계에선 그렇게 묘사되었다.

그러나 1979년 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h Khomeini)가 파리와 이라크의 망명에서 돌아와 혁명의 "최고 지도자(Supreme Leader)" 역할을 수행했을 때 그는 민주적 통치의 사회적 프로그램을 위한 최고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전 중동의 정치적 질서에 대한 공격의 이름으로 그리고 실제로는 근대성의 제도적 조정에 대한 공격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호메이니하에 이란에서 뿌리를 내린 교리는 베스트팔렌 체제 이전의 종교전쟁 이래 서방에서 실행된 그 어떤 것과도 같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공산주의자들이 국가를 이데올로기적 투쟁에서 공산당에 봉사하는 단지 행정위원회로 간주했던 것처럼 호메이니도 국가를 스스로 정당한 실체가 아니라 보다 넓은 종교적 투쟁에서 편리한 무기로 간주했다.

◇과격한 이슬람주의를 국가권력의 교리로 삼는 정치·종교 혁명

그것은 과격한 이슬람주의 원칙들을 국가권력의 교리로 내세우는 정치적-종교적 혁명이었다. 그리하여 중동의 지역적 질서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호메이니는 20세기 중동의 지도는 이슬람 공동체(umma)를 상호 분리하고 별개의 국가들을 인위적으로 창조한 제국주의자들과 폭정의 지배자들의 거짓되고 비-이슬람적 피조물이라고 공격했다.

중동에서 모든 현재의 정치제도들은 그것들이 신의 법률에 토대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부당하다는 것이다. 베스트팔렌 체제의 원칙들에 입각한 현대 국제관계는 국가들의 관계가 국가이익의 원칙이 아니라 정신적 토대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에 거짓된 토대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호메이니의 이런 혁명적 선언은 마치 18세기 유럽의 루소(Rousseau)를 상기시켰다. 루소는 유명한 사회계약론(the Social Contract)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어디에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기존의 모든 국가는 거짓된 사기계약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부당하다고 선언하면서 진정한 사회계약인 일반의지를 내세웠다. 약 200년 만에 이란의 호메이니가 비슷한 혁명을 모슬렘 용어로 표현한 것처럼 보였다.

◇신정부에 대한 반대는 정치적 반대가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취급

호메이니의 견해는 신성모독으로부터 진정으로 정당한 세계질서의 창조의 길을 가리키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쿠란의 팽창주의적 읽기에 입각했다. 첫 단계는 모슬렘 세계의 모든 정부를 타도하고 이슬람의 정부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란에서 진실로 이슬람 정치제도의 수립은, 1979년 4월 1일 호메이니가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의 수립에 대해 선언했던 것처럼, "신의 정부의 첫날(the First Day of God's Government)"임을 기록했다.

신정부가 신성한 것으로 간주될 때 이단자들은 정치적 반대가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취급되었다. 호메이니하에서 이슬람 공화국은 파도치듯 재판과 처형 그리고 소수의 신앙에 대한 체계적 탄압을 시작했는데 그 탄압의 정도가 전복된 팔레비 왕의 권위주의적 정권하에서 발생했던 것을 훨씬 초과했다.

◇이란 신정체제, 베스트팔렌 체제 부정하면서 그 체제의 공식적 보호 사칭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국제질서에 대한 이중적 도전의 형식으로 새로운 패러독스가 생겨났다. 이란의 혁명과 함께 베스트팔렌 체제를 타도하는 데 헌신적인 이슬람 운동은 아이러니하게도 근대 국가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고 유엔에 회원국 신분을 유지하고, 무역을 수행하고, 그리고 외교적 기구들을 운영하면서 베스트팔렌의 권리와 특권을 내세웠다.

그리하여 이란의 신정체제는 베스트팔렌 체제를 믿지 않는다고 반복해서 선포하면서도 그 체제의 공식적 보호를 사칭하여 두 세계질서의 교차로에 자국을 위치시켰다. 즉 이란의 신정체제는 베스트팔렌 체제에 구속당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대체하려 한다.

이 이중성이 이란 정부의 통치교리에 각인되었다. 이란의 권력구조의 우두머리인 호메이니는 단순히 이란의 정치적 인물이 아니라 이슬람 혁명의 최고 지도자로서, 그리고 이슬람 공동체와 억압받는 인민들의 지도자로서 우주적 권위를 갖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은 테헤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기습하여 그곳의 직원들을 인질로 444일간 억류함으로써 베스트팔렌 체제의 핵심적 원칙 가운데 하나인 외교적 면책권을 깡그리 위반하며 국제무대에 자신을 드러냈다.

또한 이란은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들의 전략의 일부로서 테러공격을 감행하는 레바논의 헤즈볼라(Hezbollah)와 이라크의 마디 군대(Mahdi Army) 같은 비국가적 기구들을 지원했다.

◇서방세계와의 분쟁, 기술적 양보나 협상의 형식이 아닌 세계질서의 성격에 대한 경합

이란의 이슬람 혁명의 지상명령은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수니파의 성전 집단인 하마스(Hamas)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무장시키는 것을 포함하여 보다 광범위한 반-서방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수니 대 시아'라는 분열을 넘어 협력을 허용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기존의 세계질서를 타도할 필요성에 대해 이슬람의 수니파와 시아파가 서로 일반적으로 합의했다. 이런 노력에서 소수 시아파를 대변하는 이란에게 승리는 공유된 목표를 위한 교리적 차이의 승화를 통해 상정될 수 있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이란의 헌법은 모든 모슬렘의 통일을 국가적 의무로 선포했다. 그러나 호메이니와 그의 시아파 혁명가들은 지구적 혼란이 구세주 마디(Mahdi)의 도래로 끝날 것이라고 선포하는 점에 있어서 달랐다. 혁명적 이슬람은 지금까지 서방세계가 이해하는 용어로 국제적 협력의 추구를 선포하지 않았다.

호메이니의 정책에 대한 개념 하에서 서방세계와의 분쟁은 구체적인 기술적 양보의 문제나 협상의 형식이 아니라 세계질서의 성격에 대한 경합이다.

그러므로 독일을 포함하여 유엔 상임이사 5개국과 아란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잠정협정의 완성 후인 2014년 1월 이란의 현 최고지도자 하메네이(Khamenei)는 미국인들이 이슬람 혁명의 적들이며 그들은 이슬람공화국의 적들이고 그들이 들어 올린 이 깃발의 적들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핵 협상을 전투의 한 형태이고 타협이 금지된 항구적인 종교적 투쟁의 일부라고 서술했다. 그에 따르면 성전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과 사탄의 전선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란의 역사에서 나타난 국제질서에 대한 3가지 상이한 접근법

헨리 키신저에 의하면 역사는 국가들에게 인격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란의 자부심에 차고 풍성한 역사에서 국제질서에 대한 3가지의 상이한 접근법이 뚜렷이 발견될 수 있다.

우선 호메이니 혁명 이전의 국가적 정책이 있다. 그것은 베스트팔렌 원칙들에 의해 국가이익을 사실상 추구하면서 다른 국가들의 주권을 존중하고 철저히 국경선을 지키고 동맹에도 기꺼이 참여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이란을 문명화된 세계의 중심으로 내세우고 자국의 힘이 미치는 한 주변 국가들의 자치를 제거하려는 제국의 전통이 있다.

그리고 셋째로는 이란에 성전의 모색이 있다. 이란이 이런 전통과 복잡한 유산을 어떻게 종합할 것이지는 주로 국내적 정치적 역학에 달려 있을 것이다.

◇중동, 종교가 지정학적인 목적에 봉사하는 무기가 됐다

모슬렘 세계의 내부적 갈등도 여전하다. 어떤 점에서 중동은 유럽의 베스트팔렌체제 수립 이전의 종교전쟁과 비슷한 대결에 빠져 있다. 국내적 및 국제적 갈등들이 서로를 부추긴다. 정치적, 종파적, 부족적, 영토적, 이데올로기적, 그리고 전통적 국가이익의 분쟁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종교가 지정학적인 목적에 봉사하는 데 있어서 무기화되었다. 중동에서 지금 전개되는 갈등은 종교적임과 동시에 지정학적이다. 사우디아라비아, 걸프국가들, 그리고 어느 정도 이집트와 튀르키예로 구성되는 수니파 진영이 시리아, 남부 이라크, 그리고 레바논에서 헤즈볼라와 가자에서 하마스의 민병대들을 지원하는 시아파 이란에 의해 주도되는 진영과 갈등을 겪고 있다.

수니파 진영이 시리아에서 알-아사드(al-Assad) 그리고 이라크에서 알-말리키(al-Maliki)에 대항하는 폭동들을 지원하고 있는 반면에 이란은 지역적 경쟁 국가들의 국내적 정당성을 손상하기 위해서 테헤란에 이념적으로 묶여 있는 비국가적 행위자들을 이용하여 지역적 지배를 노리고 있다.

◇중동 경합참여국들은 러시아와 미국의 지원을 추구

이런 경합의 참여국들은 외부의 지원을, 특히 러시아와 미국의 지원을 추구한다. 러시아의 목적은 주로 전략적이다. 그들은 최소한 시리아와 이라크의 성전집단들이 모슬렘 영토 안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 그리고 지구적 차원에서 미국에 대한 자국의 지위를 높이려고 한다.

미국의 난관은 도덕적 근거에서 아사드를 규탄하지만 그러나 그의 가장 큰 반대자들은 미국이 전략적으로 반대할 필요가 있는 알-카에다와 보다 극단적 집단들이다. 러시아와 미국은 서로 협력해야 할지 아니면 서로 대결해야 할지를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자살 테러와 대량파괴 무기의 확산의 시대에 범-지역적 종파적 대결로 말려드는 것은 적어도 중동의 지역적 질서의 모든 책임 있는 국가들의 협력을 요구하는 세계의 안정에 대한 변함없는 위협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끝)

※본란의 기고는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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