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이정훈 칼럼] 한미방위조약 위해 ‘벼랑끝 전술’ 펼친 이승만 대통령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review.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421010011435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4. 22. 17:36

이승만 관련 역사 바로잡기 <7-마지막회>
이정훈 사진
이정훈 (명지대 객원교수)
북핵 위기 때 북한이 구사했다는 '벼랑끝 전술(brinkmanship)'은 1956년 미국 대선에서 연임을 노리는 공화당 후보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다시 맞붙게 된 민주당의 스티븐슨 후보가 처음 쓴 말이다.

그는 1950년 시작된 매카시즘 속에서 아이젠하워 정부의 덜레스 국무장관이 소련을 상대로 '핵전쟁 발발'을 뜻하는 안보 위기를 과도하게 만들었다며 이 말을 써 시사용어로 정착시켰다.

이 용어가 만들어지기 전인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은 물론이고 가장 중요한 우방인 미국을 상대로 이 전술을 구사한 것을 아는 이는 극소수이다.

그 2년 전인 1951년 우리의 헌법은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게 돼(간선) 있었는데, 이 대통령은 소속 당이 없었기에 재선 가능성이 낮았다. 정전을 추진하는 미국을 상대하려면 미국과 맞짱 뜰 수 있는 자신이 연임돼야 한다고 확신한 그는 '대통령 직선'을 재선될 수 있는 코스로 보았다.
1951년 12월 23일 그는 자유당을 만들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불을 지폈다. 그런데 그해 초엔 국민방위군과 거창양민학살 사건이 있었기에 국회의 기류는 반(反)이승만이었다.

한 달도 안 지난 1952년 1월 18일 국회는 이 대통령이 제출한 개헌안을 압도적으로 부결시켰다. 4월 17일 민주국민당이 주축이 된 국회는 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하고 다음 대선은 5월 29일 국회에서 치른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해 4월(기초의원)과 5월(광역의원) 처음 치른 지방선거에서 자유당이 압승하자 기세가 오른 그는 '민족자결단' 등을 동원해 반공시위를 하며 야당 의원을 위협하게 했다. 5월 17일 직선제 개헌안을 다시 낸 그는 빨치산 부대가 임시수도인 부산 근처까지 침입했다며 5월 25일 계엄령을 선포했다.

다음 날엔 부산·경남 지역 계엄사령관인 된 원용덕 소장의 헌병대로 하여금 직선제 개헌에 반대한 의원들이 탄 버스를 연행해 그중 10명을 국제공산당과 관련 있다며 구속시켰다. 이름하여 '부산 정치파동'을 만든 것.

김성수 부통령(민주국민당 소속)이 사직하는 등 야당은 격렬히 반대했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자신과 국회가 내놓은 개헌안의 특징을 발췌했지만 결국은 대통령 직선제를 한다는 세칭 '발췌 개헌안'을 국회로 보내, 7월 4일 통과시키게 했다. 그리고 7월 7일 계엄령을 해제하고 8월 5일 2대 대통령 직접선거를 해 74.61%의 득표로 연임에 성공했다. 여기에서 멈췄다면 그는 독립과 건국을 했지만 독재를 한 지도자로 끝났을 터인데, 더 큰 걸음을 디뎠다.

2차 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이 세계 평화를 위해 UN을 만들 때 소련은 자국군이 해방한 동유럽 국가에 공산정권을 세우는 데 주력했다. 이에 미국이 반발해 미·소가 대립하는 냉전이 만들어졌다.

1948년 소련이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이어지는 동독 내 도로를 폐쇄한 '베를린 위기'를 만들자 1949년 4월 4일 미국은 소련 세력과의 일전에 대비해 서유럽 국가를 묶은 NATO를 창설했다. 이에 소련은 8월 29일 핵실험에 성공해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핵무장을 한 국가가 되는 것으로 맞섰다.

위기감이 고조되자 소련의 스탈린 총비서는 성동격서 전략을 택했다. 김일성을 불러 무력에 의한 한반도 공산화를 권유한 것. 1950년의 6·25는 완벽한 기습이었다. 유럽에 치중해 온 미국은 한반도 위기에 대처할 연합국을 만들 수 없었기에 UN을 동원해 UN군을 만들려 했다. 다행히 운이 좋았다. 그때 소련은 거북했는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안보리에 불참해, UN군 결성이 결정됐다.

UN은 UN군 지휘를 미국에 일임했는데, 이 대통령은 재빨리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미군에 넘겼다. 이는 미군(UN군)이 책임지고 인민군을 막으라는 압박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공산화를 면했지만 미국인들은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서 5만여 명의 젊은이가 죽어야 하는 일을 겪어야 했다.

이 때문에 38선 부근에서 전선이 교착된 1951년 6월 23일, UN 주재 소련 대표 말리크가 정전을 제안하자 미국은 응하기로 했다. 이 대통령은 단호히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고 UN과 NATO를 만든 미국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전협상이 막바지에 접어든 1953년 6월 18일, 이 대통령이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정전을 하려면 양측이 잡은 포로를 교환해야 하는데, 인민군 포로 중에서는 북한으로 가지 않겠다고 하는 반공포로가 많았다. 이 대통령은 원용덕 소장의 헌병대로 하여금 미군 몰래 이들을 풀어주게 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렸으니' 화가 난 미국은 이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에버레디 작전'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에 대한 한국 국민의 지지가 너무 강해, 집행하지 못하고 회유를 선택했다. 미국에 항복해 미군정(軍政)을 받던 일본은 1952년 독립했는데, 그 1년 전인 1951년 9월 미국과 안보조약을 맺어 일본 방어를 약속받았다. 이것과 NATO 조약에 주목한 이 대통령은 미국에 같은 것을 해줘야 한다고 고집했다.

정전이 급했던 미국이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서명되고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덕분에 8군과 7공군을 주축으로 한 주한미군이 만들어졌다. 이 대통령은 60만 한국군 무장을 위해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는다는 약속도 받아냈는데, 여기에서 '60만 한국 대군'이란 말이 나왔다. 6·25를 당할 정도로 취약했던 우리의 안보가 안전해진 것은 이때부터다.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는 이러한 기반이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외교의 귀신'인 이 대통령이 연임하지 않았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은 불가능했을 것이다.국익을 위해 독재와 반미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 대통령은 1961년 4·19로 젊은 학생들이 희생되자, 미련 없이 하야했다. 주권재민의 민주주의를 지켜준 것이다. 친미의 민주주의자이지만 국익을 위해서는 독재와 반미도 마다하지 않은 '거인 이승만'이 없었다면 G8을 넘보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이정훈 명지대학교 객원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