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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비상계엄의 밤 이후 대한민국은 대내외적으로 난관을 맞았다. 무엇보다도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리더십에 대한 신뢰가 훼손되었다. 외교와 군사안보의 일선에 서있는 지휘관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국가의 위기관리시스템까지 노출되었다. 정보전문가로부터 심리학자까지 동원되어 이해관계 국가의 전략과 리더십을 분석하는 외교전선에서 한국이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국민의 불안감과 불신감은 더 큰 문제다. 199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이스라엘 총리 시몬 페레스(당시 외무장관)는 냉소주의(冷笑主義·Cynicism)를 가장 경계할 정치적 태도로 보았다. 이 선을 넘어서면 국민의 심리적 무정부상태(Anomie)가 된다. 국민이 위기 앞에서 불감증에 빠지게 되면 긴장감을 대신해 허탈감이 나오고 내우외환이 현실화할 위험성이 높아진다.
2025년은 우리의 국가역량을 모은 합력이 절실한 시기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공동체 내의 전략적 사고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각의 이익이 절충의 여지 없이 충돌해 국론이 중심을 잡지 못한다. 전략적 사고는 평화 시에 외국과의 경쟁력을 기르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전쟁과 같이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달린 상황에서는 전력을 다해 배워 이기려는 필사적인 의지가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가 겪은 대부분 전쟁이 수동적이었기 때문에 전략전술의 창출 능력에 부족한 면이 있다. 병법의 고전을 만들고 전쟁의 입안과 수행 그리고 종결까지 주동적으로 처리한 주변 4강과의 차이다. 더구나 전후 냉전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국민은 사상·심리전에 대한 면역력을 키우기 힘든 환경이었다. 한국의 외교안보에 있어 리더십 계층의 엄중한 상황인식과 사고의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되는 배경이다.
19세기 유럽의 체스 교본에는 "승리의 비법은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워 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인의 경우에는 전통적으로 전쟁을 선호하지 않는다. 전쟁이 정치활동의 연장이라는 교과서적 정의에 대해서도 쉽게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가능한 평화를 택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략이나 속임수로 얻은 승리를 칭찬하지 않고 대체로 정공법적인 전투가 주를 이룬다.
고구려 을지문덕은 수나라 우문술에게 전공이 이미 크니 족함을 알고 돌아가라는 정중하면서도 침략을 책망하는 글을 보냈다. 전쟁은 하늘을 존중하고 자연을 좋아하며 심성이 선량한 민족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21세기 냉엄한 국제정세 속에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전략과 전술을 알아야 하고 전쟁 수행능력을 배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사회에 치열한 위기의식이 결핍된 이유는 경제발전의 자만심과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 우산에 과도히 안주해 온 결과도 클 것이다.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자주국방 의식의 해이는 안보 책임감을 이완시킨다. 군사안보뿐 아니라 대외부채의 규모와 질적 취약성 그리고 금융과 외환에서의 경제안보의 위기의식을 절감해야 한다.
국내의 정치적 투쟁이 민주주의의 기본원칙과 국민의 상식이라는 금도(禁度)를 지키면 외교전선은 이상이 없다. 외교에서 인적 네트워크가 중요한 것은 맞으나 국가의 역량은 이것을 상쇄한다. 대한민국의 국력은 외국이 필요로 할 만큼 강화되었고 지정학적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그리고 사회 각 분야의 역량은 리더십 계층이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공동체가 각각의 이익만을 앞세우고 조화하지 못하면 국가의 비전과 전략은 소거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처럼 우리의 근현대사는 빠른 속도로 발전해 왔다. 지금은 자칫 중심을 잃고 넘어지지 않도록 숨을 고르고 국가공동체의 방향성과 속도를 조정할 때다. 범지구적 전쟁위기가 고조되는 중에 남북한 내에서 외국의 외교적·군사적 활동이 공격적으로 되면 한국 외교의 피동성은 증가하고 안보의 대외의존도는 높아진다. 우리의 현안인 북방개척 진로가 막히고 한반도가 핵전쟁의 무대가 될 가능성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위치는 중견국가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대내외적으로 가지고 있는 구조적 취약점은 자만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강대국과 동일한 입장에서 국제정치를 인식하는 것은 불확실하고 위태로운 길로 이끈다. 우리 역사 속에 유지해 온 고유의 가치와 비대칭 국력을 활용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따라서 국제분쟁에의 개입이나 군사동맹의 확대에는 분명한 명분과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탄핵정국은 우리의 외교전선이 숨을 고르고 동력을 충전하는 뼈아픈 성찰(省察)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개인도 국가도 피로가 누적되어있을 때는 잠시 멈추고 역량을 재충전하고 시스템을 재조율하는 것이 순리(順理)다. 부지런한 바보보다 게으른 천재가 낫다는 속담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교훈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